'민들레 소녀Dandelion Girl'를 아세요?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민들레 소녀는 비주얼 노벨이자 현재 애니매이션으로 방영중인 '클라나드CLANNAD'에서 코토미 이야기의 핵심 요소입니다.
작중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그저께는 토끼를 보았어요. 어제는 사슴, 오늘은 당신.'이란 구절이 코토미의 책에서 나온다고 설명되어 있는데, 민들레 소녀가 바로 그 책의 이야기입니다.
리카군님의 블로그에서 원문을 보고나서, 검색해 보니 적당히 번역된 게 없는것 같아 한번 번역해 보았습니다.
참 좋은 이야기니 클라나드를 모르시는 분들도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
*어색한 표현이나 오역, 오탈자에 대한 지적 받습니다. :)
마크는 언덕위의 소녀를 보고 애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미국의 여류시인이자 극작가. 그녀의 모습은 여기서)를 떠올렸다. 아마도 그건 그녀가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민들레 빛 머리를 바람에 나부끼고 있어서 일지도몰랐다. 혹은 그녀가 입은 희고 고풍스러운 드레스가 그녀의 길고 가냘픈 다리를 휘감고 있어서 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는 그녀가과거에서 미래로 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상했으니까. 하지만 사실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서 온 것이었다.
그녀를따라 힘겹게 숨을 내쉬며 올라간 그는 그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멈춰 섰다. 그녀가 아직 그를 알아차리지 못하였기에, 그는어떻게 하면 그녀를 놀래지 않고 부를 수 있을지 고민했다. 고민하던 그는 파이프를 꺼내 담배를 채우고 불을 붙였다. 파이프 통을손으로 감싼 채 불이 붙을 때까지 연신 파이프를 불었다. 다시 그가 그녀를 쳐다봤을 때, 그녀는 그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쳐다보고 있었다.
신경 쓰일 만큼 낮은 하늘 아래에서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자신의 얼굴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그는 앞으론 하이킹을 좀 더 자주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언덕으로 가며 지나왔던 숲이, 이제는 그의 발밑에서 가을 단풍으로희미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숲 너머에는 작은 호수가 있어 오두막과 낚시터가 있었다. 그의 아내가 예상치 못하게 배심원으로소환되는 바람에 그는 애써 마련한 2주간의 여름휴가를 낮에는 홀로 낚시를, 조금 서늘해진 밤에는 거실의 난로 앞에서 역시 홀로독서를 하며 보내야 했다. 꼬박 이틀을 이렇게 보낸 그는 그 반복에 지쳐 숲속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 시작했으며, 결국 언덕에올라와 소녀를 만난 차였다.
그녀의 눈은 푸른색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 본 그녀의 가냘픈 그림자가 비쳐 오르던하늘만큼. 그녀의 얼굴은 갸름했고, 어렸고, 보드라웠고, 사랑스러웠다. 가슴 아픈 기시감에 그는 산들바람이 간질이는 그녀의 뺨을만지고픈 충동을 느꼈다. 두 손이 자신의 옆에 여전히 붙어있는데도 손끝에 얼얼함을 느꼈다.
아니, 이제 나는 마흔 넷이야.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무리 많아봐야 스물이 안 될 것 같은데.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설레는 거야? "이 경치, 마음에 드니?" 그가 큰 소리로 물었다.
"아, 네," 그녀가 빙글 돌아서선 손을 허리에 올렸다. "정말 멋있지 않나요!"
그는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 보았다. "응, 그렇지." 그가 말했다. 펼쳐진 숲은 가을빛에 물든 체 저지대를 향해 뻗어가, 몇 마일 뒤의 작은 마을을 둘러싼 채로 교외까지 뻗어 있었다. 저 멀리에는 안개가 피어나 코브 시의 톱니모양 실루엣을부드럽게 해 중세풍 성곽모양을 만들었고, 그것이 아른거리는 게 마치 현실이 아닌 꿈속을 보는 것만 같았다. "너도 도시에서왔니?" 그가 물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곤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240년 뒤의 코브 시에서 왔어요."
그는 그녀가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 미소 지었다는 것을 읽어냈지만, 동시에 적당히 맞장구 쳐 주면 괜찮을 것같다는 암시도 받았다. 그는 미소로 답했다. "그러면 기원후 2201년?" 그가 말했다. "그것 참, 엄청 발전했겠는데."
"네, 그래요." 그녀가 말했다. "이제는 대도시의 한 구역이 되어 온통 그곳으로 가는 길이 생겨 있어요." 그녀는 그들의 발치에보이는 숲의 끝을 가리켰다. "저 작은 사탕단풍 숲을 2040번 길이 지나가요." 그녀가 계속 말했다. "그리고 저기 저아카시아 나무 같은 거 보이세요?"
"응." 그가 말했다. "보이네."
"저기에 새로운 광장이생겼어요. 큰 마트가 생겨 가로지르는 데만 반나절이 걸려요. 아스피린에서부터 날으는 자동차까지 거의 모든 걸 다 살 수있어요. 마트 옆 너도밤나무 같은 게 있는 자리에는 큰 의상점이 생겨 전 세계 각국 유명 디자이너들의 최신 의상들을 살 수있어요. 지금 입고 있는 이 옷도 오늘 아침에 산거에요. 정말 예쁘죠?"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건 그녀의 말솜씨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그는 그녀가 말한 옷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그 옷은 그가 전혀 모르는 상표를 달고 있었으며, 솜사탕,바다 거품과 눈이 재료인 듯싶었다. 아무래도 마법의 직조기에는 어떤 한계도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한 어린 소녀가 지어낸이야기에 불과하겠지만.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왔나봐?" 그가 말했다.
"네. 제 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셨어요."
그는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그렇게 정직해 보이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여긴 자주 오니?"
"아, 물론이죠. 여기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공좌표에요. 네 시간이 넘게 풍경만 본 적도 있어요. 그저께는 토끼를 보았어요. 어제는 사슴, 오늘은 당신."
"하지만 어떻게 어제가 있을 수 있지?" 마크가 물었다. "만약 그렇다면 넌 항상 같은 시점으로 돌아오는 거니?"
"아, 어떤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겠군요." 그녀가 말했다. "그게 말이죠, 만물이 그렇듯 이 타임머신도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받거든요. 항상 같은 곳으로 오고 싶으면 매일 24시간 뒤로 돌려주면 돼요. 해 본적은 없어요. 전 매일매일 바뀌는 이 풍경이좋거든요."
"아버지와 함께 온 적은 있니?"
머리위로 V자 대형을 갖춘 기러기들이 느릿하게 날아가고있었다. 그녀는 잠시간 그 풍경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제 아버지는 지금 아프세요." 그녀가 결국 입을 열었다. "할 수만있다면 충분히 하실 분이세요. 하지만 못 하시기에 제가 본 것들을 말해드리고 있어요." 그리곤 급히 덧붙였다. "그건 아버지께서직접 오신 것과 거의 비슷할 거예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가슴을 움직이는 뜨거운 무언가가 있었다. "분명 그렇겠지." 그리곤 덧붙였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참 좋겠다."
그녀가 진지하게 끄덕였다. "풀밭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축복과도 같아요. 23세기에는 풀밭이 별로 없거든요."
그가 미소 지었다. "20세기 들어서 많이 없어졌지. 이곳이야 말로 절경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곳을 자주 방문해."
"이 주변에 사시나요?" 그녀가 물었다.
"3마일 즈음 가면 나오는 오두막에 머물고 있어. 휴가를 맞아 아내와 함께 올 예정이었는데, 하필이면 아내가 배심원으로 소환되는바람에 연기할 수도 없고 해서 내키진 않지만 소로우(미국의 사상가 겸 문학자. 호수가에 통나무 집을 짓고살았다)처럼 지내고 있는 중이야. 내 이름은 마크 랜돌프라고 해."
"전 줄리에요." 그녀가 말했다. "줄리 덴버."
그녀에게 딱 맞는 이름이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흰 드레스도, 푸른 하늘도, 언덕도, 9월의 바람도 모두 그녀에게 어울렸다.아마도 그녀는 숲속의 작은 마을에 살겠지만, 그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계속 미래에서 왔다고 주장하길 원한다 해도,그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중요한건 그가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그거 느낀 감정과, 그녀의 얼굴을 볼 때 마다 피어나는애정이었다. "줄리, 넌 어떤 일을 하니?" 그가 물었다. "아니면 아직 학생이니?"
"전 비서 일을 공부하고있어요." 줄리가 말했다. 그러곤 반걸음 정도 걷더니 발끝으로 한 바퀴를 휙 돌아서선 짝 하고 박수를 쳤다. "꼭 비서가 될거에요." 그녀가 다가왔다. "큰 회사의 사무실에서 중요한 사람들이 말하는 걸 받아 적는다니, 정말 멋진 일이죠. 랜돌프씨,제가 당신의 비서가 되어드릴까요?"
"그래준다면야 나야 매우 좋지." 그가 말했다. "전쟁 전, 내 아내는 비서였어. 덕분에 우리가 만난거구." 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 그는 자신이 궁금해졌다.
"아내 되시는 분께서는 좋은 비서였나요?"
"최고였어. 비서로써 그녀를 잃었을 땐 정말 아쉬웠지. 하지만 대신 아내로써의 그녀를 얻을 수 있었지. 그러니까 뭐, 잃었다고 말하기도 힘들군."
"정말 그러내요. 어, 랜돌프씨, 이젠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아버지께 오늘 봤던 것들도 말씀드려야 하고, 저녁도 차려야 하니 말이지요."
"내일도 올 거니?"
"아마도요. 지금까진 매일 왔으니까요. 안녕히 계세요, 랜돌프씨."
"잘 가거라, 줄리." 그가 말했다.
그는 그녀가 가볍게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가 사탕단풍 나무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백하고도 사십년 뒤,2040번 길이 될 장소로 가는 것을 말이다. 정말 매력적인 아이라고 생각했다.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과 그런 열정으로 삶을산다면 정말 재미있을 것이다. 그는 지금껏 이 두 자질을 거부해왔던 터라 그녀에게 감사했다. 20살일 때 그는 로스쿨에서 오직자신의 진로만을 향한 재미없는 삶을 살았고, 그 결과 24살에는 작긴 하나 사무실도 하나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열심히 일만 해온 것이었다. 아니, 사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앤과 결혼했을 땐, 잠시나마 긴박감을 잊고 살림을 꾸리기 위한 중간기가있었고, 그 뒤 전쟁이 터졌을 땐 또다시 살림을 장만하기 위한 결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긴 중간기를 보내야 했다.이때의 살림은 살림이라고 하기도 힘들 정도여서 때로는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다시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왔을 때 긴박감은마치 복수라도 하듯 다시 찾아와 먹여 살려야 할 원래의 아내에다 아들까지 생겨 버렸다. 그렇기에 그는 1년에 한번 주어지는4주간의 휴가를 빼곤 악착같이 일했다. 2주는 아들 제프와 아내가 함께 정한 곳으로, 제프가 대학으로 돌아가는 나머지 2주는아내와 함께 단 둘이서 그 호수 옆의 오두막집에서 보내게 되는 그 4주간의 휴가를 말이다. 하지만 올해는 그 두 번째 2주를홀로 보내야 했다. 외톨이로 말이다.
그의 파이프가 조금 전에 꺼져 있었지만, 그는 그걸 알아차리지도 못했다.파이프에 다시 불을 붙인 그는 바람을 막기라도 하려는 듯 깊게 내쉬었다. 그러곤 언덕을 내려가 오두막집으로 돌아갔다. 추분이지나 낮의 길이가 상당히 짧아져 있었다. 해도 다 저물어 있어서 저녁의 축축한 기운이 안개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해는그가 천천히 걸어 호수에 도착할 즈음 완전히 저 버렸다. 작긴 하나 깊은 호수였으며, 가에는 나무들이 드리워져 있었다. 물가에서조금 떨어진 소나무들 뒤에 오두막이 서 있었으며, 구불구불한 길이 낚시터로 이어져 있었다. 그 뒤에는 자갈이 깔린 비포장도로가고속도로로 이어져 있었다. 그의 차는 언제든지 문명사회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한 체로 뒤에 서 있었다.
부엌에서간단한 저녁을 챙겨 먹은 그는 거실로 돌아와 독서를 시작했다. 차고의 발전기가 이따금 윙윙거렸지만, 그날 밤은 현대인이 일상에서듣는 소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난로 옆의 책장에서 미국 명시 선집을 빼 든 그는 '언덕 위에서의오후'(애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의 작품. 원문은 여기서) 찾아 책을 뒤적거렸다. 이 명시를 그는 세 번 읽었고, 읽을 때 마다 그는 햇살을 받으며 서 있던그녀를, 바람에 나부끼던 그녀의 머리를, 아름다운 두 다리를 감싸고 마치 눈처럼 펄럭이던 그녀의 드레스를 떠올렸다. 무언가울컥하는 것을 그는 차마 삼킬 수 없었다.
책을 책장에 다시 꽂은 그는 통나무 배란다로 나가 파이프에 담배를채우고, 불을 붙였다. 그는 일부러 앤의 얼굴을 떠올렸다.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턱, 따뜻하고 속 깊지만 그로썬 알 수 없는 어떤두려움이 서린 눈, 늘 부드러운 뺨, 온화한 미소. 그 모든 것들은 그녀의 선명한 연갈색 머리와 늘씬한 키, 우아함과 함께 더욱매력적인 것이 되었다. 그가 그녀를 생각할 때 마다 항상 그렇듯, 나이 먹을 줄을 모르는 그녀를 경탄했다. 그 옛날 언젠가의아침, 수줍은 모습으로 자신의 책상 앞에 서 있던, 그 사랑스러운 모습이 지금까지 계속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십년 쯤뒤 자기 자식뻘이나 되는 몽상가 소녀와의 만남을 간절히 바라다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란 말인가. 그는 그럴 인물이 못되었다. 잠시간 그의 마음의 평정이 깨졌고, 그는 흔들렸지만,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이제 그는 진정했고, 세상은 다시 똑바로돌아갔다.
그는 파이프를 털고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침실에서 옷을 벗고 불을 끈 그는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잠이 와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결국 잠이 든 그에게 낮의 기억들이 조각조각 꿈이 되어 그에게로 찾아갔다.
"그저께는 토끼를 보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어제는 사슴, 오늘은 당신."
. . . . .
둘째 날 만난 소녀는 하늘빛 드레스와 민들레 빛 머리에 어울리는 파란색 작은 리본을 묶고 있었다. 언덕을 오른 그는 잠시간 서서목이 매여 오는 것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 그는 바람과 함께 소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부드럽게 뻗은 소녀의목과 뺨을 보자, 그는 다시금 목이 매여 오는 걸 느꼈다. 그래서 그녀가 돌아서서 "안녕하세요, 오시지 않을 줄 알았어요."라고말했음에도 대답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왔잖아." 그가 말했다. "너도 왔고."
"네."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기뻐요."
가까이에 솟아 있던 화강암이 벤치모양을 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거기에 앉아 언덕아래 펼쳐진 대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파이프를 다시꺼내 담배를 채우곤 불을 붙여 연기를 바람 속으로 불어 보냈다. "제 아버지께서도 파이프를 피우세요." 그녀가 말했다. "담배를피울 때도 아저씨처럼 통을 손으로 감싸요. 바람이 안 불 때도 말이죠. 아저씬 제 아버지와 많이 닮으셨네요."
"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보렴." 그가 말했다. "네 자신에 대해서도 좀 말해주고."
그리하여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21살이란 것과, 그녀의 아버지가 정부에서 은퇴한 물리학자란 것과, 2040번길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산다는 것, 4년 전 어머니가 돌아 가셔서 지금까지 자신이 가사를 돌보며 아버지와 단 둘이서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후 이번에는 그가 그녀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자신과 아내 앤, 그리고 아들 제프에 대한것을. 언젠가 제프와 함께 다닌 이야기라든지, 앤의 카메라 기피증 때문에 심지어 결혼식 사진도 제대로 찍지 못했다든지, 작년여름에 세 사람이서 즐겁게 캠핑을 갔던 것 따위를.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녀가 말했다. "행복한 가족이내요. 1961년은 정말 살기 좋은 해인가 보군요!"
"네 마음대로 타임머신을 쓸 수 있다면, 여기서 어디든지 가면 되잖니."
"그게 그렇게 쉽진 않아요. 아버지를 내버려 두고 다닐 생각도 없을뿐더러, 시간 경찰이 문제이거든요. 시간여행은 역사 탐험이나 하는 이들에게 정부차원에서 지원해 줄 뿐이지, 일반인은 꿈도 못 꾸는 일이에요."
"하지만 넌 잘만 다니잖니."
"그건 왜냐면 제 아버지께서 따로 만든 게 아직 시간 경찰에게는 안 걸려서 그래요."
"그러니까 넌 지금 법을 어기고 있는 거지?"
그녀가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그네들의 시간 개념에서만 그래요. 제 아버지는 다른 시간 개념을 갖고 있거든요."
그는 그저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웠기에 그녀가 어떤 말을 어떻게 두서없이, 빙빙 꼬아 말하는지는 별로 중요치 않았다. 오히려 그러길 원했다. "뭔데? 말해 보거렴." 그가 말했다.
"먼저 정부의 개념을 설명해 드릴게요. 미래에서 온 사람은 과거에 발생한 어떤 일에 물리적으로 관여해선 안 돼요. 왜냐면 미래인이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모순이 생기고, 미래는 그 모순에 맞게 바뀌어 버릴 테니까요. 그래서 시간여행부가 허가한 사람만 시간여행이 가능하며, 시간 경찰들이 옛날의 단순한 삶을 동경해서 시대를 도피하거나 다른 시대에 살려고 역사학자인 척 하는 사람들을일일이 단속하고 있어요."
"하지만 제 아버지의 개념에 따르면, 시간의 책은 이미 쓰여 있데요. 거시적 관점에서일어난 일은 이미 과거에 일어났단 것이죠. 따라서 미래인이 과거의 어떤 일에 관여하더라도 관여했다는 그것으로 끝난다는 거죠.따라서 모순 따윈 생기지 않는데요."
마크는 파이프를 깊게 빨았다. 니코틴이 필요했다. "네 아버지는 정말 대단하구나." 그가 말했다.
"그럼요!" 그녀의 뺨은 열정으로 더욱 붉어졌고, 눈은 더욱 푸르러져 반짝였다.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 랜돌프씨는상상도 못 하실 거예요. 아파트가 책으로 터질 지경이니 말이죠! 헤겔과 칸트, 흄은 물론이고, 아인슈타인과 뉴턴에 바이츠제커도있어요. 몇 가지는 저도 읽어 봤죠."
"나도 그 정돈 있어. 증명도 할 수 있지."
그녀는 그의 얼굴을 기쁜 듯이 올려 보았다. "대단해요, 랜돌프씨." 그녀가 말했다. "우리에겐 공통점이 참 많군요!"
그뒤의 대화는 두 사람이 정말 닮았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초월적 감성론이나 버클리 철학, 상대성 이론과 같은 것은 9월의 언덕위에서 남녀가 대화를 나누기에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주제였다. 그러나 그는 마흔네 살이었고 그녀는 스물한 살이었음에도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꽤나 깊이 생각해야 했으며, 그럴 가치는 충분했다. 그들은 선험과 후천에 대한 결론을 도출하기보다는 초월적감성론에 대해 열띈 토의를 벌였고, 그것은 그녀의 눈에 소우주적인 별들의 존재를 도출하는 것이었다. 또한 착한 주교님 이론이갖고 있는 고유의 약점을 드러내기보다는 버클리 철학에 대해 분석했고, 그것은 그녀의 얼굴에 홍조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또한 E는항상 mc²인지를 검증하기보다는 상대성이론에 대한 평가를 했고, 지식이 여성에게 있어 장애는커녕 매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이검증되었다.
그 순간의 기분이란 좀처럼 떠나지 않아 그가 잠을 자러 침대에 누울 때 까지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아예 앤에 대해 생각하려 하지도 않았다. 소용이 없을 테니. 대신 그는 어둠속에 누워 아무 생각이나 떠오르는 데로 공상해 보기로마음먹었다. 9월의 언덕위에 서 있는, 민들레 빛 머리를 가진 소녀에 대해서.
그저께는 토끼를 보았어요. 어제는 사슴, 오늘은 당신.
다음날 아침 그는 인근의 작은 마을로 차를 몰아 우체국에 들러 자신에게 온 편지가 없는지 확인했다. 편지는 없었다. 그는 놀라지않았다. 제프는 편지 쓰기를 그만큼 싫어했고, 앤은 외부와 연락이 두절되어 있으니(미국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위해배심원과 외부의 접촉을 단절한다). 항상 그랬듯 비서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니면 연락하지 말라고 일러두었었다.
그는 쭈글쭈글한 우체국장에게 덴버라는 성의 가족이 이 일대에 사는지 물어볼까 고민했으나, 이내 관두었다. 줄리가 공들여 쌓은 탑을무너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그는 그 세상을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망칠 생각은 더욱 나지 않았다.
그날, 소녀는 자신의 머리색과 같은 노란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그녀를 만난 그의 목이 또다시 매여와 한동안 말을 할 수가없었다. 하지만 일단 말을 꺼내기 시작하니 목매임은 사라졌다. 두 사람의 말과 생각은 마치 흐르는 물처럼 말라있던 오후의 물길을따라 흘렀다. 이번에 해어질 때는 그녀가 "내일도 오실 거죠?"라고 물었다. 늘 그가 하던 대사를 빼앗긴 샘이지만, 그 말은귓전에서 오두막으로 오는 내내 울려 퍼져 그는 베란다에서 파이프를 한대 피운 후 편히 잠들 수 있었다.
다음날언덕을 올라왔을 땐 아무도 없었다. 처음엔 실망한 마음에 시무룩해졌지만, 금세 오리라고 생각했다. 좀 늦는 것일 뿐이야, 괜찮을거야. 몇 분 안에 오겠지. 그는 화강암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몇 분이 흘러 몇 시간이 지났다.숲의 그림자가 언덕 아래까지 드리워졌다. 공기가 차가워졌다. 결국 그는 포기하고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다음날도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그는 식음을 전폐했다. 잠도 자지 않았다. 낚시에도 흥미를 잃었다. 독서 역시 그랬다.그는 자기혐오에 빠졌다. 이건 뭐 상사병에 걸린 꼬맹이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나이 사십 먹어 예쁜 얼굴과 다리에 빠져해롱거리다니 말이다. 며칠 전만 해도 다른 여자들에는 관심도 없던 그가, 불과 일주일도 안 되는 사이에 한 소녀에 관심도 아닌사랑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네번째 날 언덕을 오를 때는 이미 희망은 죽은 상태였다. 하지만 햇빛을 받으며 서있는 소녀를 보자 다시 살아났다. 이번에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는 그동안 왜 안 보였는지 짐작했으나, 정상에 올라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눈물과 떨리는 입술을 보기 전까진 말하지 않았다. "줄리, 왜 그러니?"
그녀는 그에게안겼다. 그녀는 어깨를 떨고 있었으며, 얼굴은 그의 코트에 파묻고 있었다. "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소녀가 장례식을 치르는 내내 울지 않고 있다가 이제야 처음으로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는 지금까지 그녀에게 키스한 적이 없으며, 지금도 그러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입술이 그녀의 앞머리를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유감이구나." 그가 말했다. "소중하신 분을 잃다니…."
"처음부터 죽으실 거란 걸 알고 계셨어요." 그녀가 말했다. "실험실에서 스트론튬90을 다루실 때부터 알고 계셨어요. 그런데아무에게도… 저에게도 말해주시지 않았어요. 살고싶지 않아요. 아버지가 없다면 살 이유가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아무것도…아무것도!"
그는 그녀를 부드럽게 붙들었다. "줄리, 넌 삶의 목표를 찾을거야. 넌 아직 젊어. 넌 아직 아이잖니."
갑자기 그녀가 홱 머리를 들어 마른 눈으로 그를 처다 보았다. "전 아이가 아니에요! 절 아이취급 하지 마세요!"
놀란 그는 그녀를 놓곤 뒤로 물러났다. 그는 그녀가 화를 내는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그가 말했다.
그녀의 분노는 곧 사라졌다. "제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그런 말을 하신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어요, 랜돌프씨. 하지만 전 아이가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다신 그렇게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물론이야." 그가 말했다. "약속하지."
"이젠 가야겠네요." 그녀가 말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에요."
"내, 내일은 올 테니?"
그녀는 그를 오랜 시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한 여름 소나기라도 맞은 냥 촉촉해 져 있었다. "타임머신이 고장 나 가요."그녀가 말했다. "교체할 부품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어요. 우리… 아니 제 걸로는 한번 정도는 더 올 수있겠죠. 하지만 확신은 못하겠어요."
"하지만 시도는 해 볼 거지?"
그녀가 끄덕였다. "네, 시도해 볼게요. 그리고… 랜돌프씨?"
"응, 줄리?"
"실패할지도 모르니… 기억해 주세요. 사랑해요."
그리고 그녀는 떠났다. 언덕 아래로 얼마간 달리던 그녀는 이내 사탕단풍 숲으로 사라졌다. 그의 손은 떨려 파이프에 불을 붙이려다손을 대이기까지 했다. 그 후 그는 어떻게 오두막으로 돌아왔는지, 어떻게 저녁을 먹었는지, 어떻게 잠자리에 들었는지 기억하지못했다. 하지만 그가 일어났을 때 그는 자신의 방에 있었으며, 부엌에 들어가자 저녁에 사용했던 식기들이 그대로 그릇 건조대에있었다.
그는 설거지를 하고 커피를 끓였다. 아침에는 아무 생각 없이 낚시를 했다. 곧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당장은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며, 몇 시간 뒤면 그녀를 만날 거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고장난 타임머신도 문제없이 그녀를 마을에서언덕으로 보내 줄 것이었다.
조금 일찍 도착한 그는 화강암 벤치에 앉아 그녀가 숲에서 나와 언덕위로 올라오길 기다렸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저께는 토끼를 보았어요. 어제는 사슴, 그리고 오늘은 당신.
그는 기다리고 기다렸으나, 그녀는 오지 않았다. 다음날 역시 오지 않았다. 그림자가 길어지고 공기가 차가워지자, 그는 언덕을내려가 사탕단풍 숲으로 들어갔다. 금방 길을 찾은 그는 그 길을 따라 숲을 지나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우체국에 들어선 그는자신에게 온 편지가 없냐고 물었다. 쭈글쭈글한 우체국장이 없다고 말하자,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여, 여기 주변에 덴버라는성을 가진 가족이 살고 있습니까?" 그가 엉겁결에 물었다.
우체국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성은 못 들어 봤습니다."
"최근에 마을에서 장례식이 있었나요?"
"요 일 년간은 없었습니다."
그후, 그는 그녀가 오지 않을 거란 것과 그녀가 오지 않는것처럼 그를 완전히 잊었을 거란 걸 알면서도 휴가 내내 언덕에 올랐다.저녁이면 우체국장이 잘못 알고 있던 것이길 필사적으로 바라며 마을을 방문했다. 하지만 줄리의 소식은 없었으며, 그녀에 대한 그의묘사는 지나가던 이들로부터 부정적인 반응을 얻을 뿐이었다.
10월 초, 그는 도시로 돌아갔다. 그는 앤에게 아무것도변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조금 바뀐 것을 느끼는 듯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떤 말도 묻지 않았고,시간이 갈수록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가 이상히 여겨 온 그녀의 눈에 비친 공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일요일을 맞은 그는 차를 몰고 교외로 나가 언덕위에 올랐다. 숲은 색이 더 짙어져 이젠 금색이었고, 하늘은 한 달 전 보다 푸르렀다.몇 시간을 화강암 벤치에 앉아 그녀가 사라진 곳을 응시했다. 그저께는 토끼를 보았어요. 어제는 사슴, 그리고 오늘은 당신.
어느 비가 오는 11월 밤. 그는 한 여행 가방을 발견했다. 앤의 것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 그녀가 시내로 빙고를 하러간 바람에 홀로 집을 지키던 그는 두 시간 정도 네 개의 재미없는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불현듯 작년 겨울에 직소퍼즐을 사서어딘가 둔 사실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아닌 일, 그러니까 줄리를 잊기 위해 그는 다락방으로 올라 퍼즐을 찾았다. 그가 상자들을 열어보는 동안, 그 가방이 선반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는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열려 있었다.
그는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그것은 결혼할 때 빌린 작은 아파트로 아내가 가져온 것이었다. 그는 그녀가 그것을 항상 잠가 둔 것을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웃으며 이 가방에는 남편에겐 밝힐 수 없는 비밀이 들어있다고 말한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자물쇠는 수년 동안 녹이 슬어 있었고, 떨어지면서 부서져 버렸다.
그는 가방을 닫으려다 가방 밖으로 삐져나온 흰 드레스 자락을 보곤 멈췄다. 낯익은 옷감이었다. 그는 비슷한 옷감을 얼마 전에 보았었다. 솜사탕과 바다거품, 눈을 떠오르게 하는 옷감.
그는 가방을 열고 떨리는 손으로 드레스를 들었다. 어깨부분을 잡고 펼쳤다. 방 안에 부드럽게 눈이 내린 것 같았다. 그는 그것을오랫동안 보았다. 목이 매여 왔다. 그리곤 부드럽게 접어 가방으로 다시 집어넣고 닫았다. 그는 가방을 선반 밑에 두었다.그저께는 토끼를 보았어요. 어제는 사슴, 그리고 오늘은 당신.
비가 지붕을 두드렸다. 목이 너무 매여 그는 울 것같았다. 천천히 다락방 계단을 내려온 그는 거실로 가는 나선형 계단을 내려왔다. 벽난로 위의 시계가 열시 사십분을 가리키고있었다. 곧 빙고버스가 그녀를 모퉁이에 내려줄 것이고, 그녀는 길을 걸어와 대문 앞에 설 것이다. 앤이 올 것이다…줄리가 올것이다. 줄리앤?
그게 본명이었을까? 아마도 그럴것이다. 사람들은 가명을 만들 때 이름의 일부를 쓰니까. 그녀는아마 성을 바꾸는 것으론 모자라 세례명까지 바꾸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외에 다른 것들도 해야 했을것이다. 이름을 바꾸는 것 뿐 아니라, 시간 경찰을 따돌려야 했을 것이다. 그녀가 사진 찍히길 피하는건 당연했다! 그녀가 오래전수줍어하며 그의 사무실에 직업을 구하려 들어 왔을 때 그녀는 매우 떨렸을 것이다. 그녀는 미지의 시대에서 완전히 혼자였고, 그녀아버지의 시간 개념이 옳은지도 알 수 없었으며, 40대에 자신을 사랑해 준 남자가 20대에도 사랑해 줄 지 확신할 수 없었을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와 주었다.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20년 내내 알고있었을 것이다. 그가 9월의 언덕에 올라 젊고 사랑스러운 그녀가 햇빛을 받으며 서 있는 것을 볼 것이란 걸. 그리고 그녀와사랑에 빠질 것이란 걸. 그녀는 자신에게 있어 과거의 한 부분이 그에게 있어 미래의 한 부분이 될 것이란 걸 알고 있었을것이다. 그렇다면 왜 나에게 말해주지 않은 거지? 왜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었던 거지?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그는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러곤 현관으로 달려가 비옷을 걸치고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빗속을 걸었다. 비가 얼굴로퍼부어졌고, 물방울이 그의 뺨을 타고 흘렀다. 그 중 어떤 것은 빗방울이었고, 어떤 것은 눈물이었다. 어느 누가 앤, 그러니까줄리처럼 영원히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녀는 나이 먹는 걸 두려워 해 온 걸까? 그녀는 그의 눈속에선 작은 사무실의 책상 앞에서사랑에 빠진 이후로 나이를 먹지 않아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그것 때문에 언덕에서 만난 소녀가 초면으로 보였다는 사실을그녀는 모르는 걸까?
그는 길에 도착했고, 모퉁이를 향해 걸었다. 거의 도착하였을 즈음 빙고버스가 와선 하얀트렌치코트를 입은 소녀를 내려 주었다. 그의 목은 꽉 매여 왔고, 숨을 거의 쉴 수가 없었다. 민들레 빛 머리는 조금어두워졌고, 소녀다운 매력은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11월의 창백한 가로등 불빛 아래 선 그녀의 온화한 얼굴엔 부드러운사랑스러움이 남아있었고, 길고 가냘픈 다리는 우아함과 균형미를 갖추고 있었다. 그것들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9월의 태양 아래서도알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그녀는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눈에서 익숙한 두려움을 발견했다. 이젠 그이유를 알기에 그에게 더욱 사무쳐 왔다. 그녀는 그의 눈을 흐리게 했으며, 그는 거의 눈이 먼 채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가그녀에게 다가서자 눈은 맑아졌으며, 그는 수십 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그녀의 비에 젖은 뺨에 손을 대었다. 그녀는 모든 것이 잘되었음을 알았고, 두려움은 영원히 사라졌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빗속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민들레 소녀는 비주얼 노벨이자 현재 애니매이션으로 방영중인 '클라나드CLANNAD'에서 코토미 이야기의 핵심 요소입니다.
작중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그저께는 토끼를 보았어요. 어제는 사슴, 오늘은 당신.'이란 구절이 코토미의 책에서 나온다고 설명되어 있는데, 민들레 소녀가 바로 그 책의 이야기입니다.
리카군님의 블로그에서 원문을 보고나서, 검색해 보니 적당히 번역된 게 없는것 같아 한번 번역해 보았습니다.
참 좋은 이야기니 클라나드를 모르시는 분들도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
*어색한 표현이나 오역, 오탈자에 대한 지적 받습니다. :)
민들레 소녀
Robert F. Young
번역 - 미고자라드
마크는 언덕위의 소녀를 보고 애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미국의 여류시인이자 극작가. 그녀의 모습은 여기서)를 떠올렸다. 아마도 그건 그녀가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민들레 빛 머리를 바람에 나부끼고 있어서 일지도몰랐다. 혹은 그녀가 입은 희고 고풍스러운 드레스가 그녀의 길고 가냘픈 다리를 휘감고 있어서 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는 그녀가과거에서 미래로 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상했으니까. 하지만 사실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서 온 것이었다.
그녀를따라 힘겹게 숨을 내쉬며 올라간 그는 그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멈춰 섰다. 그녀가 아직 그를 알아차리지 못하였기에, 그는어떻게 하면 그녀를 놀래지 않고 부를 수 있을지 고민했다. 고민하던 그는 파이프를 꺼내 담배를 채우고 불을 붙였다. 파이프 통을손으로 감싼 채 불이 붙을 때까지 연신 파이프를 불었다. 다시 그가 그녀를 쳐다봤을 때, 그녀는 그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쳐다보고 있었다.
신경 쓰일 만큼 낮은 하늘 아래에서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자신의 얼굴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그는 앞으론 하이킹을 좀 더 자주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언덕으로 가며 지나왔던 숲이, 이제는 그의 발밑에서 가을 단풍으로희미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숲 너머에는 작은 호수가 있어 오두막과 낚시터가 있었다. 그의 아내가 예상치 못하게 배심원으로소환되는 바람에 그는 애써 마련한 2주간의 여름휴가를 낮에는 홀로 낚시를, 조금 서늘해진 밤에는 거실의 난로 앞에서 역시 홀로독서를 하며 보내야 했다. 꼬박 이틀을 이렇게 보낸 그는 그 반복에 지쳐 숲속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 시작했으며, 결국 언덕에올라와 소녀를 만난 차였다.
그녀의 눈은 푸른색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 본 그녀의 가냘픈 그림자가 비쳐 오르던하늘만큼. 그녀의 얼굴은 갸름했고, 어렸고, 보드라웠고, 사랑스러웠다. 가슴 아픈 기시감에 그는 산들바람이 간질이는 그녀의 뺨을만지고픈 충동을 느꼈다. 두 손이 자신의 옆에 여전히 붙어있는데도 손끝에 얼얼함을 느꼈다.
아니, 이제 나는 마흔 넷이야.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무리 많아봐야 스물이 안 될 것 같은데.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설레는 거야? "이 경치, 마음에 드니?" 그가 큰 소리로 물었다.
"아, 네," 그녀가 빙글 돌아서선 손을 허리에 올렸다. "정말 멋있지 않나요!"
그는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 보았다. "응, 그렇지." 그가 말했다. 펼쳐진 숲은 가을빛에 물든 체 저지대를 향해 뻗어가, 몇 마일 뒤의 작은 마을을 둘러싼 채로 교외까지 뻗어 있었다. 저 멀리에는 안개가 피어나 코브 시의 톱니모양 실루엣을부드럽게 해 중세풍 성곽모양을 만들었고, 그것이 아른거리는 게 마치 현실이 아닌 꿈속을 보는 것만 같았다. "너도 도시에서왔니?" 그가 물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곤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240년 뒤의 코브 시에서 왔어요."
그는 그녀가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 미소 지었다는 것을 읽어냈지만, 동시에 적당히 맞장구 쳐 주면 괜찮을 것같다는 암시도 받았다. 그는 미소로 답했다. "그러면 기원후 2201년?" 그가 말했다. "그것 참, 엄청 발전했겠는데."
"네, 그래요." 그녀가 말했다. "이제는 대도시의 한 구역이 되어 온통 그곳으로 가는 길이 생겨 있어요." 그녀는 그들의 발치에보이는 숲의 끝을 가리켰다. "저 작은 사탕단풍 숲을 2040번 길이 지나가요." 그녀가 계속 말했다. "그리고 저기 저아카시아 나무 같은 거 보이세요?"
"응." 그가 말했다. "보이네."
"저기에 새로운 광장이생겼어요. 큰 마트가 생겨 가로지르는 데만 반나절이 걸려요. 아스피린에서부터 날으는 자동차까지 거의 모든 걸 다 살 수있어요. 마트 옆 너도밤나무 같은 게 있는 자리에는 큰 의상점이 생겨 전 세계 각국 유명 디자이너들의 최신 의상들을 살 수있어요. 지금 입고 있는 이 옷도 오늘 아침에 산거에요. 정말 예쁘죠?"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건 그녀의 말솜씨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그는 그녀가 말한 옷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그 옷은 그가 전혀 모르는 상표를 달고 있었으며, 솜사탕,바다 거품과 눈이 재료인 듯싶었다. 아무래도 마법의 직조기에는 어떤 한계도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한 어린 소녀가 지어낸이야기에 불과하겠지만.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왔나봐?" 그가 말했다.
"네. 제 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셨어요."
그는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그렇게 정직해 보이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여긴 자주 오니?"
"아, 물론이죠. 여기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공좌표에요. 네 시간이 넘게 풍경만 본 적도 있어요. 그저께는 토끼를 보았어요. 어제는 사슴, 오늘은 당신."
"하지만 어떻게 어제가 있을 수 있지?" 마크가 물었다. "만약 그렇다면 넌 항상 같은 시점으로 돌아오는 거니?"
"아, 어떤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겠군요." 그녀가 말했다. "그게 말이죠, 만물이 그렇듯 이 타임머신도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받거든요. 항상 같은 곳으로 오고 싶으면 매일 24시간 뒤로 돌려주면 돼요. 해 본적은 없어요. 전 매일매일 바뀌는 이 풍경이좋거든요."
"아버지와 함께 온 적은 있니?"
머리위로 V자 대형을 갖춘 기러기들이 느릿하게 날아가고있었다. 그녀는 잠시간 그 풍경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제 아버지는 지금 아프세요." 그녀가 결국 입을 열었다. "할 수만있다면 충분히 하실 분이세요. 하지만 못 하시기에 제가 본 것들을 말해드리고 있어요." 그리곤 급히 덧붙였다. "그건 아버지께서직접 오신 것과 거의 비슷할 거예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가슴을 움직이는 뜨거운 무언가가 있었다. "분명 그렇겠지." 그리곤 덧붙였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참 좋겠다."
그녀가 진지하게 끄덕였다. "풀밭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축복과도 같아요. 23세기에는 풀밭이 별로 없거든요."
그가 미소 지었다. "20세기 들어서 많이 없어졌지. 이곳이야 말로 절경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곳을 자주 방문해."
"이 주변에 사시나요?" 그녀가 물었다.
"3마일 즈음 가면 나오는 오두막에 머물고 있어. 휴가를 맞아 아내와 함께 올 예정이었는데, 하필이면 아내가 배심원으로 소환되는바람에 연기할 수도 없고 해서 내키진 않지만 소로우(미국의 사상가 겸 문학자. 호수가에 통나무 집을 짓고살았다)처럼 지내고 있는 중이야. 내 이름은 마크 랜돌프라고 해."
"전 줄리에요." 그녀가 말했다. "줄리 덴버."
그녀에게 딱 맞는 이름이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흰 드레스도, 푸른 하늘도, 언덕도, 9월의 바람도 모두 그녀에게 어울렸다.아마도 그녀는 숲속의 작은 마을에 살겠지만, 그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계속 미래에서 왔다고 주장하길 원한다 해도,그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중요한건 그가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그거 느낀 감정과, 그녀의 얼굴을 볼 때 마다 피어나는애정이었다. "줄리, 넌 어떤 일을 하니?" 그가 물었다. "아니면 아직 학생이니?"
"전 비서 일을 공부하고있어요." 줄리가 말했다. 그러곤 반걸음 정도 걷더니 발끝으로 한 바퀴를 휙 돌아서선 짝 하고 박수를 쳤다. "꼭 비서가 될거에요." 그녀가 다가왔다. "큰 회사의 사무실에서 중요한 사람들이 말하는 걸 받아 적는다니, 정말 멋진 일이죠. 랜돌프씨,제가 당신의 비서가 되어드릴까요?"
"그래준다면야 나야 매우 좋지." 그가 말했다. "전쟁 전, 내 아내는 비서였어. 덕분에 우리가 만난거구." 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 그는 자신이 궁금해졌다.
"아내 되시는 분께서는 좋은 비서였나요?"
"최고였어. 비서로써 그녀를 잃었을 땐 정말 아쉬웠지. 하지만 대신 아내로써의 그녀를 얻을 수 있었지. 그러니까 뭐, 잃었다고 말하기도 힘들군."
"정말 그러내요. 어, 랜돌프씨, 이젠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아버지께 오늘 봤던 것들도 말씀드려야 하고, 저녁도 차려야 하니 말이지요."
"내일도 올 거니?"
"아마도요. 지금까진 매일 왔으니까요. 안녕히 계세요, 랜돌프씨."
"잘 가거라, 줄리." 그가 말했다.
그는 그녀가 가볍게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가 사탕단풍 나무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백하고도 사십년 뒤,2040번 길이 될 장소로 가는 것을 말이다. 정말 매력적인 아이라고 생각했다.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과 그런 열정으로 삶을산다면 정말 재미있을 것이다. 그는 지금껏 이 두 자질을 거부해왔던 터라 그녀에게 감사했다. 20살일 때 그는 로스쿨에서 오직자신의 진로만을 향한 재미없는 삶을 살았고, 그 결과 24살에는 작긴 하나 사무실도 하나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열심히 일만 해온 것이었다. 아니, 사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앤과 결혼했을 땐, 잠시나마 긴박감을 잊고 살림을 꾸리기 위한 중간기가있었고, 그 뒤 전쟁이 터졌을 땐 또다시 살림을 장만하기 위한 결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긴 중간기를 보내야 했다.이때의 살림은 살림이라고 하기도 힘들 정도여서 때로는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다시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왔을 때 긴박감은마치 복수라도 하듯 다시 찾아와 먹여 살려야 할 원래의 아내에다 아들까지 생겨 버렸다. 그렇기에 그는 1년에 한번 주어지는4주간의 휴가를 빼곤 악착같이 일했다. 2주는 아들 제프와 아내가 함께 정한 곳으로, 제프가 대학으로 돌아가는 나머지 2주는아내와 함께 단 둘이서 그 호수 옆의 오두막집에서 보내게 되는 그 4주간의 휴가를 말이다. 하지만 올해는 그 두 번째 2주를홀로 보내야 했다. 외톨이로 말이다.
그의 파이프가 조금 전에 꺼져 있었지만, 그는 그걸 알아차리지도 못했다.파이프에 다시 불을 붙인 그는 바람을 막기라도 하려는 듯 깊게 내쉬었다. 그러곤 언덕을 내려가 오두막집으로 돌아갔다. 추분이지나 낮의 길이가 상당히 짧아져 있었다. 해도 다 저물어 있어서 저녁의 축축한 기운이 안개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해는그가 천천히 걸어 호수에 도착할 즈음 완전히 저 버렸다. 작긴 하나 깊은 호수였으며, 가에는 나무들이 드리워져 있었다. 물가에서조금 떨어진 소나무들 뒤에 오두막이 서 있었으며, 구불구불한 길이 낚시터로 이어져 있었다. 그 뒤에는 자갈이 깔린 비포장도로가고속도로로 이어져 있었다. 그의 차는 언제든지 문명사회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한 체로 뒤에 서 있었다.
부엌에서간단한 저녁을 챙겨 먹은 그는 거실로 돌아와 독서를 시작했다. 차고의 발전기가 이따금 윙윙거렸지만, 그날 밤은 현대인이 일상에서듣는 소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난로 옆의 책장에서 미국 명시 선집을 빼 든 그는 '언덕 위에서의오후'(애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의 작품. 원문은 여기서) 찾아 책을 뒤적거렸다. 이 명시를 그는 세 번 읽었고, 읽을 때 마다 그는 햇살을 받으며 서 있던그녀를, 바람에 나부끼던 그녀의 머리를, 아름다운 두 다리를 감싸고 마치 눈처럼 펄럭이던 그녀의 드레스를 떠올렸다. 무언가울컥하는 것을 그는 차마 삼킬 수 없었다.
책을 책장에 다시 꽂은 그는 통나무 배란다로 나가 파이프에 담배를채우고, 불을 붙였다. 그는 일부러 앤의 얼굴을 떠올렸다.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턱, 따뜻하고 속 깊지만 그로썬 알 수 없는 어떤두려움이 서린 눈, 늘 부드러운 뺨, 온화한 미소. 그 모든 것들은 그녀의 선명한 연갈색 머리와 늘씬한 키, 우아함과 함께 더욱매력적인 것이 되었다. 그가 그녀를 생각할 때 마다 항상 그렇듯, 나이 먹을 줄을 모르는 그녀를 경탄했다. 그 옛날 언젠가의아침, 수줍은 모습으로 자신의 책상 앞에 서 있던, 그 사랑스러운 모습이 지금까지 계속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십년 쯤뒤 자기 자식뻘이나 되는 몽상가 소녀와의 만남을 간절히 바라다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란 말인가. 그는 그럴 인물이 못되었다. 잠시간 그의 마음의 평정이 깨졌고, 그는 흔들렸지만,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이제 그는 진정했고, 세상은 다시 똑바로돌아갔다.
그는 파이프를 털고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침실에서 옷을 벗고 불을 끈 그는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잠이 와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결국 잠이 든 그에게 낮의 기억들이 조각조각 꿈이 되어 그에게로 찾아갔다.
"그저께는 토끼를 보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어제는 사슴, 오늘은 당신."
. . . . .
둘째 날 만난 소녀는 하늘빛 드레스와 민들레 빛 머리에 어울리는 파란색 작은 리본을 묶고 있었다. 언덕을 오른 그는 잠시간 서서목이 매여 오는 것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 그는 바람과 함께 소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부드럽게 뻗은 소녀의목과 뺨을 보자, 그는 다시금 목이 매여 오는 걸 느꼈다. 그래서 그녀가 돌아서서 "안녕하세요, 오시지 않을 줄 알았어요."라고말했음에도 대답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왔잖아." 그가 말했다. "너도 왔고."
"네."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기뻐요."
가까이에 솟아 있던 화강암이 벤치모양을 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거기에 앉아 언덕아래 펼쳐진 대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파이프를 다시꺼내 담배를 채우곤 불을 붙여 연기를 바람 속으로 불어 보냈다. "제 아버지께서도 파이프를 피우세요." 그녀가 말했다. "담배를피울 때도 아저씨처럼 통을 손으로 감싸요. 바람이 안 불 때도 말이죠. 아저씬 제 아버지와 많이 닮으셨네요."
"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보렴." 그가 말했다. "네 자신에 대해서도 좀 말해주고."
그리하여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21살이란 것과, 그녀의 아버지가 정부에서 은퇴한 물리학자란 것과, 2040번길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산다는 것, 4년 전 어머니가 돌아 가셔서 지금까지 자신이 가사를 돌보며 아버지와 단 둘이서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후 이번에는 그가 그녀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자신과 아내 앤, 그리고 아들 제프에 대한것을. 언젠가 제프와 함께 다닌 이야기라든지, 앤의 카메라 기피증 때문에 심지어 결혼식 사진도 제대로 찍지 못했다든지, 작년여름에 세 사람이서 즐겁게 캠핑을 갔던 것 따위를.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녀가 말했다. "행복한 가족이내요. 1961년은 정말 살기 좋은 해인가 보군요!"
"네 마음대로 타임머신을 쓸 수 있다면, 여기서 어디든지 가면 되잖니."
"그게 그렇게 쉽진 않아요. 아버지를 내버려 두고 다닐 생각도 없을뿐더러, 시간 경찰이 문제이거든요. 시간여행은 역사 탐험이나 하는 이들에게 정부차원에서 지원해 줄 뿐이지, 일반인은 꿈도 못 꾸는 일이에요."
"하지만 넌 잘만 다니잖니."
"그건 왜냐면 제 아버지께서 따로 만든 게 아직 시간 경찰에게는 안 걸려서 그래요."
"그러니까 넌 지금 법을 어기고 있는 거지?"
그녀가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그네들의 시간 개념에서만 그래요. 제 아버지는 다른 시간 개념을 갖고 있거든요."
그는 그저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웠기에 그녀가 어떤 말을 어떻게 두서없이, 빙빙 꼬아 말하는지는 별로 중요치 않았다. 오히려 그러길 원했다. "뭔데? 말해 보거렴." 그가 말했다.
"먼저 정부의 개념을 설명해 드릴게요. 미래에서 온 사람은 과거에 발생한 어떤 일에 물리적으로 관여해선 안 돼요. 왜냐면 미래인이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모순이 생기고, 미래는 그 모순에 맞게 바뀌어 버릴 테니까요. 그래서 시간여행부가 허가한 사람만 시간여행이 가능하며, 시간 경찰들이 옛날의 단순한 삶을 동경해서 시대를 도피하거나 다른 시대에 살려고 역사학자인 척 하는 사람들을일일이 단속하고 있어요."
"하지만 제 아버지의 개념에 따르면, 시간의 책은 이미 쓰여 있데요. 거시적 관점에서일어난 일은 이미 과거에 일어났단 것이죠. 따라서 미래인이 과거의 어떤 일에 관여하더라도 관여했다는 그것으로 끝난다는 거죠.따라서 모순 따윈 생기지 않는데요."
마크는 파이프를 깊게 빨았다. 니코틴이 필요했다. "네 아버지는 정말 대단하구나." 그가 말했다.
"그럼요!" 그녀의 뺨은 열정으로 더욱 붉어졌고, 눈은 더욱 푸르러져 반짝였다.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 랜돌프씨는상상도 못 하실 거예요. 아파트가 책으로 터질 지경이니 말이죠! 헤겔과 칸트, 흄은 물론이고, 아인슈타인과 뉴턴에 바이츠제커도있어요. 몇 가지는 저도 읽어 봤죠."
"나도 그 정돈 있어. 증명도 할 수 있지."
그녀는 그의 얼굴을 기쁜 듯이 올려 보았다. "대단해요, 랜돌프씨." 그녀가 말했다. "우리에겐 공통점이 참 많군요!"
그뒤의 대화는 두 사람이 정말 닮았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초월적 감성론이나 버클리 철학, 상대성 이론과 같은 것은 9월의 언덕위에서 남녀가 대화를 나누기에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주제였다. 그러나 그는 마흔네 살이었고 그녀는 스물한 살이었음에도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꽤나 깊이 생각해야 했으며, 그럴 가치는 충분했다. 그들은 선험과 후천에 대한 결론을 도출하기보다는 초월적감성론에 대해 열띈 토의를 벌였고, 그것은 그녀의 눈에 소우주적인 별들의 존재를 도출하는 것이었다. 또한 착한 주교님 이론이갖고 있는 고유의 약점을 드러내기보다는 버클리 철학에 대해 분석했고, 그것은 그녀의 얼굴에 홍조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또한 E는항상 mc²인지를 검증하기보다는 상대성이론에 대한 평가를 했고, 지식이 여성에게 있어 장애는커녕 매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이검증되었다.
그 순간의 기분이란 좀처럼 떠나지 않아 그가 잠을 자러 침대에 누울 때 까지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아예 앤에 대해 생각하려 하지도 않았다. 소용이 없을 테니. 대신 그는 어둠속에 누워 아무 생각이나 떠오르는 데로 공상해 보기로마음먹었다. 9월의 언덕위에 서 있는, 민들레 빛 머리를 가진 소녀에 대해서.
그저께는 토끼를 보았어요. 어제는 사슴, 오늘은 당신.
다음날 아침 그는 인근의 작은 마을로 차를 몰아 우체국에 들러 자신에게 온 편지가 없는지 확인했다. 편지는 없었다. 그는 놀라지않았다. 제프는 편지 쓰기를 그만큼 싫어했고, 앤은 외부와 연락이 두절되어 있으니(미국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위해배심원과 외부의 접촉을 단절한다). 항상 그랬듯 비서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니면 연락하지 말라고 일러두었었다.
그는 쭈글쭈글한 우체국장에게 덴버라는 성의 가족이 이 일대에 사는지 물어볼까 고민했으나, 이내 관두었다. 줄리가 공들여 쌓은 탑을무너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그는 그 세상을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망칠 생각은 더욱 나지 않았다.
그날, 소녀는 자신의 머리색과 같은 노란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그녀를 만난 그의 목이 또다시 매여와 한동안 말을 할 수가없었다. 하지만 일단 말을 꺼내기 시작하니 목매임은 사라졌다. 두 사람의 말과 생각은 마치 흐르는 물처럼 말라있던 오후의 물길을따라 흘렀다. 이번에 해어질 때는 그녀가 "내일도 오실 거죠?"라고 물었다. 늘 그가 하던 대사를 빼앗긴 샘이지만, 그 말은귓전에서 오두막으로 오는 내내 울려 퍼져 그는 베란다에서 파이프를 한대 피운 후 편히 잠들 수 있었다.
다음날언덕을 올라왔을 땐 아무도 없었다. 처음엔 실망한 마음에 시무룩해졌지만, 금세 오리라고 생각했다. 좀 늦는 것일 뿐이야, 괜찮을거야. 몇 분 안에 오겠지. 그는 화강암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몇 분이 흘러 몇 시간이 지났다.숲의 그림자가 언덕 아래까지 드리워졌다. 공기가 차가워졌다. 결국 그는 포기하고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다음날도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그는 식음을 전폐했다. 잠도 자지 않았다. 낚시에도 흥미를 잃었다. 독서 역시 그랬다.그는 자기혐오에 빠졌다. 이건 뭐 상사병에 걸린 꼬맹이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나이 사십 먹어 예쁜 얼굴과 다리에 빠져해롱거리다니 말이다. 며칠 전만 해도 다른 여자들에는 관심도 없던 그가, 불과 일주일도 안 되는 사이에 한 소녀에 관심도 아닌사랑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네번째 날 언덕을 오를 때는 이미 희망은 죽은 상태였다. 하지만 햇빛을 받으며 서있는 소녀를 보자 다시 살아났다. 이번에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는 그동안 왜 안 보였는지 짐작했으나, 정상에 올라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눈물과 떨리는 입술을 보기 전까진 말하지 않았다. "줄리, 왜 그러니?"
그녀는 그에게안겼다. 그녀는 어깨를 떨고 있었으며, 얼굴은 그의 코트에 파묻고 있었다. "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소녀가 장례식을 치르는 내내 울지 않고 있다가 이제야 처음으로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는 지금까지 그녀에게 키스한 적이 없으며, 지금도 그러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입술이 그녀의 앞머리를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유감이구나." 그가 말했다. "소중하신 분을 잃다니…."
"처음부터 죽으실 거란 걸 알고 계셨어요." 그녀가 말했다. "실험실에서 스트론튬90을 다루실 때부터 알고 계셨어요. 그런데아무에게도… 저에게도 말해주시지 않았어요. 살고싶지 않아요. 아버지가 없다면 살 이유가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아무것도…아무것도!"
그는 그녀를 부드럽게 붙들었다. "줄리, 넌 삶의 목표를 찾을거야. 넌 아직 젊어. 넌 아직 아이잖니."
갑자기 그녀가 홱 머리를 들어 마른 눈으로 그를 처다 보았다. "전 아이가 아니에요! 절 아이취급 하지 마세요!"
놀란 그는 그녀를 놓곤 뒤로 물러났다. 그는 그녀가 화를 내는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그가 말했다.
그녀의 분노는 곧 사라졌다. "제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그런 말을 하신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어요, 랜돌프씨. 하지만 전 아이가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다신 그렇게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물론이야." 그가 말했다. "약속하지."
"이젠 가야겠네요." 그녀가 말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에요."
"내, 내일은 올 테니?"
그녀는 그를 오랜 시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한 여름 소나기라도 맞은 냥 촉촉해 져 있었다. "타임머신이 고장 나 가요."그녀가 말했다. "교체할 부품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어요. 우리… 아니 제 걸로는 한번 정도는 더 올 수있겠죠. 하지만 확신은 못하겠어요."
"하지만 시도는 해 볼 거지?"
그녀가 끄덕였다. "네, 시도해 볼게요. 그리고… 랜돌프씨?"
"응, 줄리?"
"실패할지도 모르니… 기억해 주세요. 사랑해요."
그리고 그녀는 떠났다. 언덕 아래로 얼마간 달리던 그녀는 이내 사탕단풍 숲으로 사라졌다. 그의 손은 떨려 파이프에 불을 붙이려다손을 대이기까지 했다. 그 후 그는 어떻게 오두막으로 돌아왔는지, 어떻게 저녁을 먹었는지, 어떻게 잠자리에 들었는지 기억하지못했다. 하지만 그가 일어났을 때 그는 자신의 방에 있었으며, 부엌에 들어가자 저녁에 사용했던 식기들이 그대로 그릇 건조대에있었다.
그는 설거지를 하고 커피를 끓였다. 아침에는 아무 생각 없이 낚시를 했다. 곧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당장은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며, 몇 시간 뒤면 그녀를 만날 거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고장난 타임머신도 문제없이 그녀를 마을에서언덕으로 보내 줄 것이었다.
조금 일찍 도착한 그는 화강암 벤치에 앉아 그녀가 숲에서 나와 언덕위로 올라오길 기다렸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저께는 토끼를 보았어요. 어제는 사슴, 그리고 오늘은 당신.
그는 기다리고 기다렸으나, 그녀는 오지 않았다. 다음날 역시 오지 않았다. 그림자가 길어지고 공기가 차가워지자, 그는 언덕을내려가 사탕단풍 숲으로 들어갔다. 금방 길을 찾은 그는 그 길을 따라 숲을 지나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우체국에 들어선 그는자신에게 온 편지가 없냐고 물었다. 쭈글쭈글한 우체국장이 없다고 말하자,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여, 여기 주변에 덴버라는성을 가진 가족이 살고 있습니까?" 그가 엉겁결에 물었다.
우체국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성은 못 들어 봤습니다."
"최근에 마을에서 장례식이 있었나요?"
"요 일 년간은 없었습니다."
그후, 그는 그녀가 오지 않을 거란 것과 그녀가 오지 않는것처럼 그를 완전히 잊었을 거란 걸 알면서도 휴가 내내 언덕에 올랐다.저녁이면 우체국장이 잘못 알고 있던 것이길 필사적으로 바라며 마을을 방문했다. 하지만 줄리의 소식은 없었으며, 그녀에 대한 그의묘사는 지나가던 이들로부터 부정적인 반응을 얻을 뿐이었다.
10월 초, 그는 도시로 돌아갔다. 그는 앤에게 아무것도변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조금 바뀐 것을 느끼는 듯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떤 말도 묻지 않았고,시간이 갈수록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가 이상히 여겨 온 그녀의 눈에 비친 공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일요일을 맞은 그는 차를 몰고 교외로 나가 언덕위에 올랐다. 숲은 색이 더 짙어져 이젠 금색이었고, 하늘은 한 달 전 보다 푸르렀다.몇 시간을 화강암 벤치에 앉아 그녀가 사라진 곳을 응시했다. 그저께는 토끼를 보았어요. 어제는 사슴, 그리고 오늘은 당신.
어느 비가 오는 11월 밤. 그는 한 여행 가방을 발견했다. 앤의 것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 그녀가 시내로 빙고를 하러간 바람에 홀로 집을 지키던 그는 두 시간 정도 네 개의 재미없는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불현듯 작년 겨울에 직소퍼즐을 사서어딘가 둔 사실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아닌 일, 그러니까 줄리를 잊기 위해 그는 다락방으로 올라 퍼즐을 찾았다. 그가 상자들을 열어보는 동안, 그 가방이 선반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는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열려 있었다.
그는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그것은 결혼할 때 빌린 작은 아파트로 아내가 가져온 것이었다. 그는 그녀가 그것을 항상 잠가 둔 것을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웃으며 이 가방에는 남편에겐 밝힐 수 없는 비밀이 들어있다고 말한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자물쇠는 수년 동안 녹이 슬어 있었고, 떨어지면서 부서져 버렸다.
그는 가방을 닫으려다 가방 밖으로 삐져나온 흰 드레스 자락을 보곤 멈췄다. 낯익은 옷감이었다. 그는 비슷한 옷감을 얼마 전에 보았었다. 솜사탕과 바다거품, 눈을 떠오르게 하는 옷감.
그는 가방을 열고 떨리는 손으로 드레스를 들었다. 어깨부분을 잡고 펼쳤다. 방 안에 부드럽게 눈이 내린 것 같았다. 그는 그것을오랫동안 보았다. 목이 매여 왔다. 그리곤 부드럽게 접어 가방으로 다시 집어넣고 닫았다. 그는 가방을 선반 밑에 두었다.그저께는 토끼를 보았어요. 어제는 사슴, 그리고 오늘은 당신.
비가 지붕을 두드렸다. 목이 너무 매여 그는 울 것같았다. 천천히 다락방 계단을 내려온 그는 거실로 가는 나선형 계단을 내려왔다. 벽난로 위의 시계가 열시 사십분을 가리키고있었다. 곧 빙고버스가 그녀를 모퉁이에 내려줄 것이고, 그녀는 길을 걸어와 대문 앞에 설 것이다. 앤이 올 것이다…줄리가 올것이다. 줄리앤?
그게 본명이었을까? 아마도 그럴것이다. 사람들은 가명을 만들 때 이름의 일부를 쓰니까. 그녀는아마 성을 바꾸는 것으론 모자라 세례명까지 바꾸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외에 다른 것들도 해야 했을것이다. 이름을 바꾸는 것 뿐 아니라, 시간 경찰을 따돌려야 했을 것이다. 그녀가 사진 찍히길 피하는건 당연했다! 그녀가 오래전수줍어하며 그의 사무실에 직업을 구하려 들어 왔을 때 그녀는 매우 떨렸을 것이다. 그녀는 미지의 시대에서 완전히 혼자였고, 그녀아버지의 시간 개념이 옳은지도 알 수 없었으며, 40대에 자신을 사랑해 준 남자가 20대에도 사랑해 줄 지 확신할 수 없었을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와 주었다.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20년 내내 알고있었을 것이다. 그가 9월의 언덕에 올라 젊고 사랑스러운 그녀가 햇빛을 받으며 서 있는 것을 볼 것이란 걸. 그리고 그녀와사랑에 빠질 것이란 걸. 그녀는 자신에게 있어 과거의 한 부분이 그에게 있어 미래의 한 부분이 될 것이란 걸 알고 있었을것이다. 그렇다면 왜 나에게 말해주지 않은 거지? 왜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었던 거지?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그는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러곤 현관으로 달려가 비옷을 걸치고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빗속을 걸었다. 비가 얼굴로퍼부어졌고, 물방울이 그의 뺨을 타고 흘렀다. 그 중 어떤 것은 빗방울이었고, 어떤 것은 눈물이었다. 어느 누가 앤, 그러니까줄리처럼 영원히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녀는 나이 먹는 걸 두려워 해 온 걸까? 그녀는 그의 눈속에선 작은 사무실의 책상 앞에서사랑에 빠진 이후로 나이를 먹지 않아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그것 때문에 언덕에서 만난 소녀가 초면으로 보였다는 사실을그녀는 모르는 걸까?
그는 길에 도착했고, 모퉁이를 향해 걸었다. 거의 도착하였을 즈음 빙고버스가 와선 하얀트렌치코트를 입은 소녀를 내려 주었다. 그의 목은 꽉 매여 왔고, 숨을 거의 쉴 수가 없었다. 민들레 빛 머리는 조금어두워졌고, 소녀다운 매력은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11월의 창백한 가로등 불빛 아래 선 그녀의 온화한 얼굴엔 부드러운사랑스러움이 남아있었고, 길고 가냘픈 다리는 우아함과 균형미를 갖추고 있었다. 그것들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9월의 태양 아래서도알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그녀는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눈에서 익숙한 두려움을 발견했다. 이젠 그이유를 알기에 그에게 더욱 사무쳐 왔다. 그녀는 그의 눈을 흐리게 했으며, 그는 거의 눈이 먼 채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가그녀에게 다가서자 눈은 맑아졌으며, 그는 수십 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그녀의 비에 젖은 뺨에 손을 대었다. 그녀는 모든 것이 잘되었음을 알았고, 두려움은 영원히 사라졌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빗속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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